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어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적절히 묘사할 알맞은 예화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분의 희생 정도를 묘사하기 위해 가상적인 예화를 들기도 하는데요. 한 무리의 개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헌데가 더덕더덕 나고 고름이 줄줄 흐릅니다. 한 인간이 자신을 낮추어서 개가 되어 준다면, 그 모든 개가 임박한 죽음으로부터 살 수 있다고 가정해 봐요. 우리 가운데 자진해서 인간의 신분을 버리고 말 못하는 천덕꾸러기 개로 자신을 낮출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들리긴 하지만, 하나님 아들의 굴욕을 나타내 보이기에는 너무나도 빈약한 예화인거 같습니다. 정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 가족의 일원이 되시기 전에 예수께서 가지고 계셨던 왕의 자리를, 그리고 그분께서 버리셨던 영광의 위치를 우리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겠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속죄 (Atonement) 를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사건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셨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께 대하여 감사하는 생애를 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크게 투자한 것에 가장 큰 가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제가 잘 아는 분께 들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한번은 무심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언젠가 저는 전도 집회를 끝내고 한 사람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밤마다 집회에 잘 참석했는데도 불구하고, 결심하지 않은 사업가였죠.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서로 꽤 친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서 그를 찾아갔어요. 그는 한번도 복음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저의 부드러운 질문을 받자.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어요. 마지막으로 물었어요. “김 선생님? 당신이 오늘 밤 죽는다면 영생을 얻을 희망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겁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고백해본 적이 전혀 없답니다.”
너무도 냉담한 그의 태도에 놀란 저는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김 선생님. 만일 당신이 오늘 저녁에 마을 사람 10명의 사인을 받아오기만 한다면, 내일 은행에서 천만 원의 돈을 당신에게 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마을을 다니면서 10명의 사인을 받아오시겠습니까?” 그가 말했죠 “물론이죠! 하고 말고요!” 저는 다시 말했습니다 “서류에 한 사람의 사인을 빠뜨려서 천만 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으시겠죠?” 그가 말하길 “천만에요~ 꼭! 받아야지요? 그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요.”
김 선생은 구원이 정말 좋은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더욱 친절히 그에게 말했습니다. “김 선생님. 당신은 오늘과 내일 사이에 천만 원을 얻을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오늘밤에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는데, 그것은 상관이 없다고 말하시나요? 영원한 생명보다 돈에 더 귀한 가치를 두시는군요. 당신의 평가 기준은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치러진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참 가슴 아프고 여러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 였던거 같아요.
김 선생과의 대화를 통화여,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그토록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게 된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그가 수많은 그리스도인 틈에서 생활을 하였고,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어오긴 했겠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하나의 순교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루살렘 근방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던 수많은 순교자의 죽음과 유사한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른 순교자들의 죽음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질을 당하고, 못 박히고, 창에 찔리는 고통과 같은 신체적인 고통으로 돌아가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극심하게 매질을 당하거나 못 박힌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뇌에 비교할 수는 없겠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랐을까요?
그분께서는 어떤 종류의 죽음을 당하셨던 걸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히 2:9)셨다고 말입니다. 잠시 이것을 생각해 볼까요? 그분은, 나의 죽음을, 여러분의 죽음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끝 날에 우리 자신들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일까요? 예 맞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의 신비와 경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첫 번째 사망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둘째 사망을 대신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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